돌봄과 작업 2
🔖 나는 역설적으로 돌봄을 통해 인간의 돌봄 역량이 몹시 작고 하찮다는 점을 깨달았다.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돌본 이후에야 내 둘레에 명확히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존재들의 둘레에 있는 경계선도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드러난 태도는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다른 존재에 대한 외면이 아닌 존중이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 타인을 도우려고 할 때 그것이 타인의 경계를 침해하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허황되게 착각하는 (자아가 팽창된) 이들이 선의에서 출발해 다른 존재들에 해를 입히고 나아가 스스로에게도 해를 입히는 역동을 인지하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분들 중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제도, 어떤 관습, 어떤 도덕, 어떤 강요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닌 돌봄을 짊어지게 된 분들이 있다면 과감히 떨쳐내기를 바란다.
결혼을 한 것도, 소설을 쓰기로 한 것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모두 내 선택이었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책임도 내 몫인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왕이면 내 선택이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기도 하다. 동시에 그 마음이, 내가 가지 않은 길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김유담)
한편 나는 우리가 인간성이 그 어느 때보다 고양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출산이나 양육을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고민하고 심사숙고해서 결정 할 수 있는 물적, 정치적, 심리적 토대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여성들이 자기 몸과 관련해 갖는 선택권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물론 이 변화를 위해 무수한 희생과 저항이 있었으며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온 사회가 저출생이 큰 문제라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우리는 그 재앙의 긍정적인 뒷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까지 여성들이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 위험하고 모욕적인 피임과 낙태, 정당한 대가와 존중 없는 돌봄에 얼마나 많이내 몰려왔는지 잠시 동안만 멈춰 서서 (우리 부모나 조부모의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면, 이런 숙고야말로 인류의 정신이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몸과 재생산에 대해 더 고민하고, 더 자발적이고 책임감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선택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해야 할 필요는 있겠다. 우리가 돌봄에서 배운 '선택'의 의미는 우리가 학교와 사회에서 흔히 배워왔던 협소한 '선택'의 의미(무한한 시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상품을 선택해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쇼핑하는 행위)와 다르다.
이 책에서 쓰인 맥락을 종합해보면, 선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제약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 해내는 행위이다. 선택은 가성비나 유불리를 따지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과 결심, 그리고 믿음의 행위이다. 자연스럽게 선택에는 그에 따르는 결과를 '수용'한다는 뜻이 포함된다. 선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선택 이후의 수용 과정에서 완결된다.